이 책을 ‘올해의 책’이라고 부르고 싶다. ‘종이책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독특하고 아름다운 복제 예술품’이라고 답하며 내밀 만한 책이다. 고전학자이자 시인인 앤 카슨의 《녹스》는 종이가 아코디언처럼 이어진다. 그러니까 페이지 숫자가 없다. 종이 한 장이 책이다. 가격은 55,000원. 《녹스》는 읽을거리라기보다 찬찬히 감상해야 할 물성의 예술품이다. 22년 동안 보지 못했던 친오빠의 죽음을 접하고 애도하는 방식이 시인답다.
책이 나오기 전에 가제본 형태로 볼 기회가 생겼다. 꼼꼼히 감상한 뒤에 소감을 이렇게 기록했다.
“앤 카슨의 밤(녹스)은 까맣게 빛난다. 슬픔이 아름다운 형식으로 깊어졌다. 내가 충분히 알 수 없는 사적인 죽음의 이야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다시 책의 앞으로 되돌아간다. 하나로 이어지는 아코디언 같은 물성의 책에는 페이지 숫자가 없으므로, 책이 보여주는 흐름에 몸을 맡겨야 한다. 죽음을 애도하는 눈물은 보이지 않는다. 카슨이 잘 숨겨놨기 때문이다. 고전학자인 카슨 시인은 고대 로마 시인 카툴루스의 시를 번역하는 과정을 왼쪽 면에 흐르게 두었고, 오빠의 죽음에 관한, 차마 다 말할 수도 없는, 부스러지기 쉬운 말들을 오른쪽 면에 흘렸다.
카슨은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우리를 훈련시킨다고 이야기를 꺼냈다. 묻기, 탐색하기, 채집하기, 의심하기, 애쓰기, 시험하기, 잘못을 따지기, 그리고 무엇보다 인간들이 행하는 이상한 일들에 놀라 벌떡 일어서기로 훈련은 진행된다고. 오빠의 죽음을 전해 들은 카슨은, 그 훈련대로 죽은 이의 일생을 묻고 탐색하고 채집하고 의심하고 애쓰고 시험하며 잘못을 따지는 모든 과정을 단순히 활자로 기록하지 않고, 사진 자료 등을 손으로 뜯고 가위로 오리고 풀로 붙이고 색을 칠하여 형태 그대로 남겼다.
번역된 《녹스》는 원본의 고유성을 유지했다. 깜깜한 밤을 손으로 더듬어 앞으로 나아가는 기분. 점점 어둠이 몸에 스며들었고, 빛을 본 듯한 기분으로 두 번째 읽기를 마쳤다. 카슨의 밤은 과연 까맣게 빛났다.
‘어제는 바꿀 수 없어요. 오늘은 달리해볼 수 있을지도요. 내일은 아무런 약속도 해주지 않아요’라고 말한 카슨 오빠의 부인은 애도의 절정에 이른 것일까. 약속을 해주지 않는 내일도 나는 《녹스》를 읽겠다. 빛을 보고 싶으니까. 어쩌면 세 번째에는 스스로 빛을 낼 수도 있을 것만 같다.”
이 소감의 다짐대로 《녹스》가 출간된 후 다시 읽었다. 아마도 조만간 또 한 번 읽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