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가 직업인 저자는 청탁받은 원고를 쓰며 산다. 이상한 표현인가. 작가라고 하면 될 것을 굳이 글쓰기가 직업이라고 밝힌 것이. 작가라는 존재는 자신이 원하는 이야기를 쓰지만 저자는 생계를 위해 누군가 원하는 원고를 써준다.
이런 저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기록했다. 살았던 집들에 대한 저자의 사적인 기록은 우리 시대 집의 위상과 변천사로 고찰할 수 있다.
“그곳에 살지 않았다면 지금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것이다”라는 저자의 고백은 집이 한 개인 여성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단적으로 말해준다.
저자는 대구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크고 화려한 집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의 사업이 몰락하자 이사하며 사회적 맥락으로서 주거지의 의미를 어렴풋이 깨닫는다. 주거지 명칭만으로도 계층이 나뉘는 학교 친구들 사이에서 사적인 공간이 공적으로 평가받는 것을 목격한다. 집 안으로 눈을 돌려 누군가에게는 쉼터이지만 누군가에게 보수도 출퇴근도 휴일도 없이 매일 똑같은 일을 반복하는 가사 노동의 현장이라는 것도 인식한다. 인식을 통해 새로운 질문을 던지고 성장하며 어른이 된다.
상경한 저자가 거친 원룸과 투룸, 신혼집에 이르기까지 서울 대도시 거주지에 대한 다큐적인 기록은 환경-인간의 문제로까지 나아간다. 동네의 열악한 환경이 만들어낸 인간적인 갈등과 무례함으로 인해 인간성을 유지하려면 노력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얻는다. 그런 체념 섞인 자각에서 “이웃들을 좋아할 수는 없었지만 차마 미워할 수도 없었다”는 연민의 마음을 토로한다.
개인의 집 이야기가 왜 이렇게 공감되는가. 집이 삶의 배경이기 때문이다. 집에서 삶으로, 보편성을 얻으며 이야기는 깊어진다.
흡인력 있는 저자의 문장들은 독자를 다음 집, 그다음 집으로 데려간다. 생활의 분투, 여성의 독립과 연애에 대한 증언의 장소인 집 이야기를 듣고 나면, 내가 살았던 집들이 바로 호출된다. <친애하는 나의 집에게>는 그렇게 저자에서 읽는 사람에게로 이야기 바통을 넘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