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택 시인의 열세 번째 시집이다. 농촌과 농민의 삶을 풍자한 첫 시집 <섬진강>으로 새로운 서정의 세계를 연 시인은 이후 쉼 없는 창작으로 많은 독자를 위무하고 힘을 주었다. 초기 시 작품에서 농촌 서사를 긴 형태로 담았던 시인의 시어들은 점차 간결해졌다. 절제된 시어들의 울림은 그대로 독자에게 가닿았다. 자연에서 비롯된 시인의 시적 상상력은 소박하고 절실했으며 긴장감이 높았다.
섬진강 마을, 자신이 태어난 바로 그 집에서 그대로 나이 들어가는 시인의 희귀한 삶은 시의 진실과 연결된다. 자신의 삶 한복판에 들어온 자연을 시인은 어떻게 노래하는가.
“잘 왔다/ 어제와 이어진/ 이 길 위에/ 검은 바위, 어린나무만이 나비를/ 숨겨준다” (시 <나비가 숨은 어린나무> 중에서)는 시를 읽으면 금세 가벼이 날아오를 나비가 눈앞에 보인다. 움직이는 나비가 찾아든, 움직이지 못하는 바위와 어린나무에게 시인은 새로운 도치법으로 생명력을 부여한다. 나비를 숨겨주는 적극적인 몸짓의 생명력.
<비와 혼자>라는 시를 읽는다. “소낙비가 쏟아졌다/ 커다란 가지 아래 서서/ 비를 피했다 / 양쪽 어깨가 젖어/ 몸의 자세를 이리저리 자꾸 바꾸었다/ 먼 산에도,/ 비가 그칠 때까지 / 비와 혼자였다”. 우산도 없이 가지 아래서 비를 피하는 사람의 적막한 마음은 다 젖은 듯하다. 어떤 과잉된 의미도 없고 꼬인 수사도 없이 담백한 시들은 그대로 마음의 풍경화다.
자연의 대상물을 스쳐 보내지 않고 찬찬히 들여다보는 시인의 눈에만 포착되는 세계들, 그 미세한 변화와 독특한 결들이 여백이 많은 시행 사이에서 그대로 숨쉰다.
“며칠 동안 눈이 왔다/ 나는 창밖으로 눈보라 치는/ 강을 보며 지냈다 / 눈이 녹고 강 길이 터졌다/ 강을 따라 내려갔다/ 내가 걸어가는 쪽이 남쪽이어서/ 가슴이 따뜻해져왔다”(<바람을 달래는 강물 소리> 중에서). 무슨 말을 덧붙일 수 있겠는가. 강물 소리가 바람을 달래고 있다는데. 시를 읽는 내내 자연의 힘 앞에서 겸손해지는 것은 물론, 사람의 연약함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자연의 헤아릴 길 없는 깊고 넓은 품에서 잠들어도 좋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