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여정 배우의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수상은 우리 모두에게 기쁨을 안겨주었다.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물론 한국인이어서, 여성이어서, 노년의 현역 배우여서 등 제각각의 이유로 수상을 애틋하게 받아들였다. 내 마음도 어떤 희망으로 출렁거리는 것을 느꼈다. 74세 배우의 환한 빛이 내 마음에 들이차고 나를 감쌌다. 나이 들어간다는 것, 왠지 스스로 지치고 무력한 몸을 가졌다고 한탄하고 싶을 때, 더 이상 창의적인 아이디어나 성실한 직업 의식을 발휘하기엔 낡았다고 시무룩해졌을 때, 윤여정 배우를 떠올리며 힘을 얻게 될 것이다. 권위적이지 않은 유머러스한 말들과 여유 있는 자세는 나이 든 여성의 참신함을 돋보이게 했다. 노년에 대한 새로운 자각, 명징한 통찰이 담긴 책을 다시 펼친다.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박완서 지음
세계사 2020
이렇게 신선할 수 있을까. 박완서 작가가 타계한 지 10년, 그동안 출간했던 산문들 중 대표작 35편을 다시 엮어 만든 책은 마치 처음 읽은 듯 새롭다. 시대를 뛰어넘은 목소리. 어른의 가르침은 문학적으로 찬란하고 현실적으로 따뜻하여 지금 이곳으로 박완서 작가가 현현한 것만 같다. 70년대와 80년대의 이야기인데 세속의 혼란이나 불안한 개인에 대한 성찰은 깊다. 특히 나이 들어가는 것, 죽음에 대한 생각은 철학자의 음성이다.
“가장 무서운 것은 안 죽는 것이다. 이 세상에 안 죽는 사람은 없다지만 너무 안 죽고 오래 살아 혈육이나 친구 중 자기보다 젊은 사람이 죽는 걸 보아야 하는, 순서가 바뀐 죽음처럼 무서운 건 없다. 사람이 나이 순서대로 죽게 되어 있다면 세상에 무슨 걱정이 있을까도 싶지만, 그렇게 되면 산다는 것이 죽음 앞에 늘어선 무력하고 긴 줄서기하고 무엇이 다를까. 오늘 살 줄만 알고 내일 죽을 줄 모르는 인간의 한계성이야말로 이 세상을 움직이는 원동력이다.”
죽음에 대한 명상은 박완서 작가의 독특한 언어를 통해 삶의 의지로 이어진다. ‘때로는 죽음도 희망이 된다’는 제목의 산문은 희망 없이는 사람이 살아갈 수 없다는 보편적인 정서를 문학적으로 표현한 강렬한 글이었다.
나이 들어가며 죽음을 두려워하거나 도망치려는 마음을 가다듬고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삶의 방식과 방향에 마음의 추를 달아놓을 때, 노년은 생기를 잃지 않고 담백하고 아름다운 시절이 될 것이다. 박완서 작가의 체험에서 씌어진 글들은 이토록 진실하다.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에릭 와이너 지음, 김하현 옮김
어크로스 2021
호락호락하지 않은 인생길에서 철학자의 이야기들은 지혜로 삼으면 좋다. 이 책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부터 몽테뉴까지 위대한 철학자들의 삶과 사유를 찾아 떠나는 여행기다. 기차를 타고 떠나는 철학 여행이랄까, ‘익스프레스’가 붙은 제목이 인상적이다.
책의 구성은 인생의 새벽부터 황혼까지 필요한 조언을 철학자의 삶과 글 속에서 끄집어내었다. 미국의 베스트셀러 저자이자 강연가인 에릭 와이너는 유머러스한 문체로 방대한 철학적 지식을 한 권에 담았다.
나는 이 책에서 인생의 황혼기를 먼저 찾아 읽었다. 특히나 여성 철학자이자 작가인 시몬느 드 보부아르의 ‘노년’에 대한 성찰은 흥미로웠다. 저자는 보부아르가 <노년>이라는 585쪽의 두꺼운 책을 쓰며 나이든다는 것에 좌절감과 당혹감을 설파한 것을 분석한다. 노년과의 만남은 결코 부드럽게 이뤄지지 않으며 언제나 정면으로 충돌한다는 명제를 들면서.
보부아르는 나이 듦에 대해 분노했다. 처음에는 자기 나이와 충돌한 채 노화를 이해하지 못했다. 성공적인 노화는 없는 것일까. 저자는 말한다. “노화는 질환이 아니다. 병이 아니다. 비정상이 아니다. 문제가 아니다. 노화는 연속체이며, 우리 모두 그 연속체 위에 있다. 우리 모두가 언제나 늙어가고 있다.” 명쾌하다.
보부아르의 두려움은 점점 희미해지고 고요한 수용, 심지어 즐거움으로 바뀐다. 보부아르는 “나는 내 운명에 만족하며 내 운명이 어떤 식으로든 변하길 원치 않는다”는 적극적인 수용의 자세로 의식을 전환했다. 그래서 늘 하던 글쓰기를 지속했고 음악을 들으며 삶이 침체되는 것을 놔두지 않았다. 보부아르가 노년에 성공적으로 다다른 것은 누구도 의식하지 않고 끝까지 나답게 살겠다는 의지를 불태웠기 때문이다. 나이 든 여성 철학자 보부아르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나다운 인생은 무엇일까 곰곰이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