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글은 대부분 길에서 줍거나 지나는 이들에게서 훔친 것들이니까요.”라는 고백이 책 띠지에 적혀 있다. 시인의 산문 100편으로 이루어진 <걸어서 돌아왔지요>는 서울 서초동 향나무 이야기로 시작하여 황성, 경주, 제주도 등 전국 곳곳의 길을 지나 전주 덕진동 연못에서 멈춘다.
한 편 당 15매 내외의 글에서는 시인의 낮은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모든 글의 서술어는 ‘-습니다’로 경어체를 구사했고, 길에서 보고 느낀, 사소하지만 울림이 오래 가는 이야기는 잊고 지내는 것들, 그 소중함을 떠올리게 한다.
시인은 약력마저도 독특하게 썼다. 약력을 바꿔 쓰게 된 사연이 시인답다.
“‘제천에서 나고 인천에서 자랐다’를 요즘에는 이렇게 고쳐 쓰고 있습니다. ‘제천이 낳고 인천이 키웠다’, 어느 날 문득 문장의 결함을 발견하고 나서부터입니다. ‘나고 자랐다’는 표현은 ‘마음대로’ 세상에 태어나고 ‘제멋대로’ 성장했다는 의미가 아닌가!”
언어에 민감한 시인의 약력 문구에 대한 자각은 길과 자연, 사람의 성장에 대한 이야기로 이끈다. “그간 저를 낳아준 땅에 무심했습니다. 길러준 땅에 무례했습니다.” 슬며시 웃게 되는 반성문이다.
윤회를 믿는 시인은 ‘걷는다’는 행위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내세에 태어난다면, 돼지나 파리나 두꺼비가 아니라 사람으로 태어난다면, 갖고 싶은 이름이 있다고. 미국 사람으로 태어난다면 ‘워커’, 걷는 사람이란 이름을, 일본 사람으로 태어난다면 ‘고진’, 행인이란 이름으로 불리고 싶다는 것이다.
왜 시인은 걷는 사람이 되고 싶은가. 윤동주 시인의 시 한 줄을 믿고 따르겠다는 시인은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를 인용하면서 시절과 인연을 탓하지 않고 묵묵히 걸어가는 인생을 찬미한다. 그렇다고 수동적이고 순응적인 삶을 살겠다는 것은 아니다.
‘사람에게 물어보자’라는 제목의 글에서 시인은 어떤 일이 일어나면 사람에게 묻지 않고 카메라에게 묻는 세태, 기계한테 잠을 깨워달라고 하고 기계한테 날씨를 묻는 상황, 선생님 말씀조차 인터넷에 물어 진위를 확인한 뒤에 고개를 끄덕이는 풍조,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길을 내비게이션에 물어보는 사람들에게 “사람에게 묻자”라는 당부로 인간적인 삶을 일깨운다.
사람을 믿고 소통하는 사회에 대한 갈구는 정보화사회의 퇴행 같은 개념은 아니다. 인간적인 온기를 나누자는 시적인 마음이다. 길을 걷는 인생들은 서로의 온기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