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자 생활 57년, 시인 활동 45년, 암환자로서 투병 13년. 이해인 수녀의 삶을 굳이 숫자로 표기해보면 이렇다. 1976년에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를 출간한 이후 수도자로서 성실하고 낮은 자세로 일관한 생활에서 흘러나온 기도 같은 시집들은 많은 사람을 위로해주었다. 시와 영성의 조화를 꿈꾸는 삶의 세목이 빼곡한 산문집은 지혜로운 글로 가득했다.
<이해인의 말>에는 투병하며 겪는 인간적인 아픔과 이웃의 사연에 고개 숙이는 모습, 쉬지 않는 시 창작과 문학적 지향까지, 이해인 수녀의 이야기가 시집과 산문집을 넘어서 모두 다 드러나 있다. 수도자의 통찰과 시인으로서 메시지가 육성으로 들린다. 안희경 재미 저널리스트의 집중적인 인터뷰로 이끌어낸 수녀의 말들은 묵직하고도 담백하다.
“모든 생명 속에 죽음이 깃들어 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이 죽어가고 있고, 그렇게 이별을 함께한다는 것을 묵상하지 않을 수가 없답니다. 죽음 속의 생명, 삶 속에 있는 죽음을 말이에요.”
법정 스님, 강우일 주교, 김수환 추기경, 박완서 소설가 등 친분을 나누던 종교계와 문화계의 인물들이 떠났다. 그 빈 자리에서 이해인 수녀는 사랑이 닿았던 넓고 큰 세계를 추억한다. 이별했지만 떠난 사람들이 남긴 사랑은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작은 실천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자각한다. 주위를 밝히는 수도자의 활동은 쉬지 않고, 이는 우리 일상의 단단한 토대가 된다.
“남들이 볼 때는 우리끼리 잘 먹고 잘 살며, 세상사엔 관심 없는 것처럼 보여도 우리 의식은 약자들에게 계속 열려 있어요. 마음이 편할 날이 없습니다.” 수녀원의 일상이 정갈하고 안온한 듯 보이지만 사회적 갈등과 질병, 가난을 의식하고 있고 차별받는 약자에 대한 마음 역시 뜨거워서 그들을 향한 손길은 분주하다.
“수도 생활 50년을 하고 난 제 심정이 어떠냐 물으면 ‘담백한 물빛의 평화를 느낀다’라고 말할 수 있어요. 치우치지 않는, 차별하지 않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만나는 상대가 누구든 ‘비상을 꿈꾸는’ 영혼이라는 걸 잊지 않는다는 수도자의 영성은 물처럼 자연스럽게 세상으로 흐른다. 수녀원에서 회의할 때 소외되고 아픈 사람 곁으로 가야 한다는 주제가 먼저 설정된다는 고백도, 하느님의 일을 사람들의 삶 안에서 되살리려는 노력을 구체적으로 해야 한다는 다짐도 눈물겹다.
조그만 사랑을 많이 만들라는 것, 조그만 기쁨이 들어가도록 마음의 창을 열라는 당부는 시적인 마음 그대로다. 우리 사는 세상에서 인간적인 만남은 그리 길지 않으므로 사랑하고 꿈꾸고 기도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