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가 기본이라고 생각하는 책들이 있다. 옛이야기, 인물 이야기, 과학 도감 등이다. 어린이가 적기에 즐겁게 볼 수 있다면 모두 바람직한 책이다. 반면 “이런 책들을 보면 하나라도 배우는 게 있겠지!”하는 의도가 숨어 있다면 의외로 효과는 반감된다. 부모의 욕심이 어린이에게 알게 모르게 투영되어 읽는 재미가 떨어질 수 밖에 없다. 초등 저학년까지 사회나 과학책을 읽는다고 어린이가 지식 그 자체를 습득하는 건 아니다. 초등학교 내내 어린이에게 책은 오락이고 자극이다. 더뎌보이지만 어린이는 이 과정을 천천히 거쳐 읽는 사람이 된다. 이번 겨울에 자녀가 역사책 혹은 과학책을 읽도록 해야겠다고 생각했다면 처음에는 좀 만만한 책부터 시작해보는 게 좋다. 해당 분야에 대한 호기심과 탐구심을 북돋아 주는 것이 지식보다 먼저다. 그런 책들을 몇 권 소개한다.
쭈글쭈글 주름
박정선 지음
비룡소 2008
한마디로 생활에 숨어 있는 작은 단서를 발견하고 이를 일반화하는 탐구 정신을 담은 그림책이다. 우리 몸 혹은 일상에서 볼 수 있는 작은 것이 어떻게 활용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과학의 씨앗’ 시리즈 중 한 권이다. 이 시리즈의 가장 큰 장점은 생각의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이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빨대가 무엇인지 혹은 바퀴가 무엇인지를 알려주지 않는다. 대신 바퀴의 원리를 어떻게 이용하는지를 보여줘 생각의 지평을 넓힌다.
어린이가 ‘중력’이나 ‘가속도’같은 추상화된 개념이나 지식을 받아들이려면 시간이 필요하다. 그보다 중요한 건 “왜 그럴까”하는 호기심과 탐구하는 과정이다. 시리즈 중에 <쭈글쭈글 주름>은 우선 우리 몸에 주름이 있는 곳을 먼저 찾아본다. 그러면서 주름의 특징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그렇다면 일상에서 주름의 원리를 활용한다면 어떻게 될까로 서서히 시야를 확장한다. 이렇게 우리 몸에서, 집에서 주름을 찾아보고 “왜?” 라고 말해보는 것, 이것이 창의력을 키우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7-8세)
열네 번째 금붕어
제니퍼 홀름 지음
다산기획 2015
과학은 무얼까. 과학자는 무얼 하는 사람들일까? 이를 알고 싶다면, 과학자의 삶을 다룬 인물 이야기를 읽는 방법이 있다. 하지만 과학자의 삶이나 업적이 어린이에게 재미있기란 쉽지 않다. 도리어 과학을 담은 동화를 읽는 방법을 추천한다. 과학책을 읽는다는 마음 없이 ‘과학과 친구 되는 길’이다. 어린 시절에 무언가를 좋아하는 데는 거창한 이유나 계기보다 과정의 즐거움이 중요하다. 강제적으로 읽어야 하는 과학전집 보다 우연히 집어든 흥미로운 한 권의 책이 더 효과적일 수 있다.
제니퍼 홀름의 <열네 번째 금붕어>는 과학을 품은 성장동화다. 과학자인 할아버지가 젊어지는 신약을 개발하고 자신에게 임상 실험했다. 결과는 할아버지는 열네 살 소년으로 돌아간 것! 이렇게 할아버지가 손녀와 함께 학교에 다닌다는 판타지 설정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몸은 소년이지만 마음은 노인인 할아버지는 세상 돌아가는 게 마음에 안 든다. 시종일관 투덜거린다. 초등학생 엘리에게 “박사 과정에 들어가려면 좋은 성적이 필요하다”고 잔소리를 하고, 음식을 주문할 때도 학위 순으로 하자며 억지를 부린다. 불평꾼 할아버지와 자유주의자인 엘리의 엄마, 잘하는 게 없다고 생각하는 엘리 등 인물이 부딪히며 웃음과 재미를 선사한다. 동화의 가장 큰 장점은 할아버지를 통해 과학하는 마음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이다. 후속권인 <세 번째 버섯>도 출간되어 있다. (초등 4학년 이상)
요리조리 맛있는 세계 여행
최향랑 지음
창비 2004
세계사나 세계지리도 공부로 접근하면 외울 것만 잔뜩 있는 지루한 과목이다. (코로나 이전까지만해도) 이웃 나라를 여행할 일도 많고, 세계의 음식이나 문화를 접하기 쉬운 세상이다. 이런 방법을 이용하면 세계의 역사나 문화를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다. 특히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관심사를 세계로 통하는 문으로 활용하면 좋다. 예를 들어 세계의 자동차, 세계의 기차와 만나는 방법이다.
이 중에서도 어린이들이 가장 흔하게 접할 수 있는 건 음식이다. 어린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피자도 그렇고, 쌀국수나, 크레페 등은 다른 나라의 음식이지만 이제는 우리 모두 즐기고 있다. 음식을 먹는 동안 원래 어느 나라 음식인지, 왜 만들었는지, 그 나라는 어디에 있는지 등을 알아가며 자연스럽게 세계와 만날 수 있다. <요리조리 맛있는 세계 여행>은 엄마와 딸이 음식 여행을 하는 설정으로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중국 쓰촨성의 마파두부를 만드는 할머니를 만나 중국인들의 음식 이야기뿐 아니라 만리장성과 경극 그리고 만두와 교자 등 생활과 문화를 엿볼 수 있다. 한 나라의 음식 여행이 끝나면 음식을 만드는 법까지 소개된다. 책에 소개된 레시피를 따라 음식을 만들어 맛보는 것까지가 세계사 공부다. (초등 3학년부터)
너의 운명은
한윤섭 지음
푸른숲주니어 2020
부모들이 가장 많은 관심을 가진 분야 중 하나가 역사다. 하지만 저학년 어린이는 말할 것도 없고 고학년이라도 역사로 직진하면 낯설고 힘들어 한다. 역사적 흐름과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먼저 만나는 과정이 필요하다. 예컨대 역사를 배경으로 한 동화를 먼저 만나면 시간의 간극을 좁힐 수 있다. 한윤섭은 전작인 <서찰을 전하는 아이>에서 동학농민운동을 배경으로 탁월한 역사 동화를 선보인 바 있다. 간혹 역사 교과서의 부교재처럼 이야기성이 떨어지는 역사 동화가 없지 않다. 한윤섭의 역사 동화는 그 자체로도 훌륭한 작품이라 믿고 볼 수 있다.
<너의 운명>은 일제의 조선을 합병하자 일어난 의병 운동을 그린 작품이다. 아비 없이 삯바느질하는 어미와 사는 수길이가 어떻게 의병이 되겠다고 마음먹는지를 그렸다. 역사의 고비마다 나라를 지키려고 나선 이들이 있다. 대체 그들은 어떻게 가족을 두고, 목숨이 위협 받는 고된 길을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일까. <너의 운명은>은 바로 이 질문을 던진다. 단 한 번만이라도 ‘자기 삶의 자리가 깊은 암흑’임을 스스로 깨달은 자가 삶을 바꾸기 위해 길을 나서는 여정이 감동적이다. 역사를 아는 것보다 역사의식을 배우는 것이 진짜 역사 교육이다. (초등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