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이후 사람들은 ‘노력한 만큼 보상받는 사회’라는 믿음을 갖고 살았습니다. ‘능력주의’ 이면에는 가족의 부와 다양한 지원은 물론 상속에 의한 자산 이전이 개인의 삶을 결정하는 ‘상속주의’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일라이자 필비는 현대 사회에서 어떻게 상속이 곧 계급이 되는지 찬찬히 톺아봅니다. 아무리 친한 친구 사이라도 속내를 드러내기 어렵고 가족과 터놓고 말하기 어려운 주제가 바로 상속입니다. 동일한 조건에서 똑같이 경쟁한 결과가 아니라면 성공과 실패, 행복과 불행이 모두 개인의 책임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이 문제는 누군가를 위한 변명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세상의 본질을 들여다보기 위해 기성세대가 여전히 고민하는 문제입니다.
내 자식들을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맹목적 희생과 물불 안 가리는 눈먼 사랑이 아니라 다음 세대, 우리 모두의 아들딸이 함께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위한 고민의 중심에 ‘상속’이 놓여 있습니다. 불편하지만 외면할 수 없는 상속을 직시하면 교육, 취업, 주택, 노후 문제 등 다양한 사회 문제의 본질을 파악할 수도 있습니다. 대한민국의 현실은 다양한 문제가 얽혀 있으며 특별한 비법으로 풀기 어렵고 정치인들에게 기대하기도 어렵습니다. 가족이 모여 한 사회와 국가를 이룹니다. 능력주의를 넘어 상속주의는 이제 피할 수 없는 우리들의 현실적 고민이 되었습니다.
베이비붐 세대의 등장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일라이자 필비는 교육과정에서 이미 능력주의는 환상일 뿐이라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헬리콥터 맘부터 MZ세대의 탄생, 맞벌이와 페미니즘 문제까지 영국 사회에서 경험한 저자의 이야기는 대한민국의 현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가 『구별 짓기』에서 강조했던 사회자본과 문화자본은 결국 경제 자본에 의해 형성됩니다. 한 사람의 직업, 경제력, 사회문화적 취향 등은 피눈물 나는 개인의 노력보다 상속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의미입니다.
가진 게 없어 한숨짓는 부모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자식은 어느 쪽을 부러워하거나 비난할 수도 없는 삶의 조건일 뿐입니다. 다만 우리는 이 격차가 상속되어 곧바로 사회적 신분으로 굳어지는 문제를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부모 찬스가 계급이 되는 과정을 살피지 않아도 대한민국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물질만능주의가 팽배해 있으며 치열한 경쟁과 각자도생의 시대로 접어든 지 오래입니다. 이제, 다음 세대를 위한 어른들의 고민을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상황입니다. “21세기의 상속주의 사회는 20세기 능력주의 사회에서 생성된 기회들을 토대로 구축되었다. 특히 교육과 주택이 그런 기회들의 창구였다.”라는 저자의 지적이 매우 아프게 들리는 게 우리들의 현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