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해가 저물어 갈 무렵이면 사람들은 희망찬 새해를 설계하기 전에 뒤를 돌아본다. 좋은 추억을 떠올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대개 아쉬운 일들을 성찰하고 반면교사로 삼기 위함이다. 기억과 망각은 인간의 현존재를 지탱하는 철학적 기반이지만 무엇보다 미래를 위한 정리의 방법이기도 하다.
올 한해는 어떻게 살았으며 내년에는 또 어떻게 살 것인가. 일 년을 단위로 시간을 구분하는 이유는 하루, 한 달을 조금 더 충실하게 채우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 무엇을 향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돌아보면서 자기 삶의 방향을 재설정하고 송구영신하는 마음을 다독여 보는 12월이다.
생각이 복잡하고 일상이 바쁠 때는 책도 손에 잡히지 않는다. 그럴 때는 잠깐씩 시간이 날 때마다 시 몇 편을 읽어보는 건 어떨까. 시인의 눈을 빌어 사물을 관찰하고 익숙한 일들을 새롭게 바라보는 순간 새해를 맞는 마음이 달라질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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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의점에서 잠깐
정호승 글 | 창비 |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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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을 닮은 허구의 세계에서 벌어지는 사건과 인물들 사이의 갈등이 소설을 읽는 재미라면 시는 개별 독자에게 그려지는 마음의 무늬다. 그 이미지를 따라 지나간 시간을 떠올리고 번잡한 마음을 정리하기 좋다. 인간은 이성적 동물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모든 일은 마음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인과관계를 따지고 합리적 이유를 생각해 보지만 대개 설명하기 힘든 감정에서 비롯된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타인과 세상, 사랑과 이별, 하늘과 별에 관한 정호승의 시를 오랫동안 읽어 온 독자들은 편의점에서 잠깐 스치듯 읽어도 좋을만큼 따뜻한 시들이 반갑다. “나는 패배가 고맙다 내게 패배가 없었다면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 살아남기 위해 패배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패배했기 때문에 살아남았다”(「패배에 대하여」 중에서) 이 시집의 서시는 ‘패배’로 시작한다. 바라는 대로 세상이 성공한 인생, 행복한 일상으로 가득하다면 시인은 아마 시를 쓰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고독과 슬픔이 인생의 기본값이라는 깨달음을 얻을 무렵인 사람들에게 정호승의 시는 뜨끈한 국밥 한 그릇, 쓴 소주 한 잔만큼 진하게 가슴에 닿는다. ‘희노애락애오욕’을 거치며 한 생을 견디는 사람들에게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감동적인 위로를 건네는 시인이 곁에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당신이 아니라면 누가 나를 위해 울어줄 수 있을 것인가 누가 나의 상처에서 흐르는 분노의 눈물을 닦아줄 수 있을 것인가”(「당신이 아니면」) 곁에 있는 누군가를 떠올리거나 지나간 인연을 생각나게 하는 수많은 ‘당신’은 누구인가. 만해 한용운의 말대로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마음속에 그리운 것 하나씩 품고 살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 공감은 인간의 보편적 정서라고 착각하지만 사람과 상황에 따라 다르게 적용되는 감정이기도 하다. 다만 시인은 그 폭과 넓이를 세상 전체로 확장하려는 사람일 뿐이다. 기막힌 표현과 반짝이는 언어가 아니라도 좋다. 우리가 내뱉는 말들이 시가 될 수도 있으려면 타인을 헤아리는 배려, 이기적 욕망에 대한 성찰이 먼저다.
외로우니까 사람이고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고 했던 정호승은 여전히 우리에게 묻는다. 혼자라서 외로운 게 아니라 사람과 세상에 대한 사랑이 부족한 게 아니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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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약과 공터
허연 글 | 문학과지성사 |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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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도 나이를 먹는다. 정호승도 허연도 어느덧 중년을 넘어 노년으로 접어들 것이다. 세월 앞에서 머뭇거리다 보면 독설과 자학이 뒤섞인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어!”라는 버나드 쇼의 묘비명이 생각난다. “살았던 날들을 헤아려보면 어떤 날은 셀 수 있었고 어떤 날은 셀 수 없었다.”(「숯」 중에서) 허연의 서시는 이렇게 시작한다. 셀 수 있는 날과 셀 수 없는 날의 차이는 무엇일까. 그건 아마도 사람마다 다른 기쁨과 슬픔, 성공과 실패, 행복과 절망의 나날들이리라. 아무도 모르게 지우고 싶은 순간, 영원히 기억하고 싶은 찰나가 뒤섞인 사람들의 인생은 무지개처럼 자기만의 빛깔로 다채롭다.
허연의 시는 반복적 일상과 사소한 일들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힘이 있다. 누구나 경험했거나 스쳐 지나간 사물에 대한 애정이 배어 있다. 또한 시인 자신의 내밀한 고백과 담담한 진술이 독자들에게 위로와 감동을 전한다. 특별한 일이 아니라고, 그래도 괜찮다고, 그럴 수도 있다고. 하지만 반성과 성찰을 통해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말들이 숨어 있기도 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조금 더 나은 인간으로 내일을 맞이할 수 없을 테니까.
“시를 쓰면서 슬픔에 슬픔을 보태거나 죽음에 죽음을 보태는 일을 했다”(「슬픔에 슬픔을 보탰다」 중에서) 이열치열의 정신으로 무장한 듯 보이는 시인의 고백이다. 시는 어쩌면 상처와 고통을 외면하지 않고 직시하는 내 안의 또 다른 나와 대면하는 일이다. 우리에겐 때때로 맞서 싸우는 전사가 되라는 충고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보듬으라는 따뜻한 목소리가 필요하다. 떠나는 것들과 다가오는 것들을 말없이 살필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