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 깊어가던 날 오후, 한 음악당 뜨락에서 후배와 함께 그림책 『관리의 죽음』(안톤 체호프 지음, 고정순 그림, 길벗어린이, 2022)을 폈다. 이 작품에 관한 그림책 애호가 후배의 감상을 듣고 싶었다. 의사 체호프의 창작 서사를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그림으로 표현한 이 작품을 대하며, 역시 의사인 후배는 ‘어~ 어~ 심리 묘사가 정말 대단하네요!’라며 감탄한다. 한 줄 감상을 요청했더니 ‘지금 우리 사는 시대에 가장 잘 어울리는 그림 작가’ 같단다.
『관리의 죽음』 책에서 해설자는 ‘불안이 만들어 낸 병적인 집착’을 이 작품의 주요 소재라고 소개한다. 최근 여러 SF 동화들은 새로운 차원의 우리 미래상을 전하지만, 현실 사회에는 난제들이 여전하다. 염려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고 만들어내는 고전적인 어린이책을 소개하고 싶었다. 여러 겹 쌓인 불안과 불편 속에서도 늘 꿈과 소망을 그려내 ‘우리 시대의 작가’라 불리는 고정순의 따스하고 속정 깊은 작품을 골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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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춘당
고정순 지음 | 길벗어린이| 2023
책 제목인 『옥춘당』은 제사상에서 색동옷처럼 알록달록 무늬에 동그랗게 반짝이는 사탕 이름이다. 작가는 진한 사랑과 그리움을 품고, 돌아가신 할아버지 할머니 이야기를 이 그림책에 쓰고 그렸다. 긴 세월이 담긴 빛바랜 앨범 같은 그림책에서 두 분 이야기는 사탕 옥춘당처럼 동그랗게 반짝인다. 작가는 밝힌다. “옷매무새를 단정하게 매만지듯 이야기를 그림책으로 다시 어루만집니다.” 특히 다음 몇 구절이 마음에 콕 박힌다. “오줌은 (휴지) 두 칸 똥은 세 칸 / 머무를 수 없는 금산요양원 13번 침대 / 고자동 씨와 김순임 씨는 전쟁고아였다.”
어렵게 살아오신 할아버지는 저녁이면 돌아갈 집의 존재를 가장 염려하셨다. 동네 주민들이 집 빌려주기를 꺼리는 여성들에게 선뜻 집을 내어주시던 너그러운 할아버지였다. 폐암 말기를 선고받자 할아버지는 할머니와 함께 옛날을 돌아보고 변함없이 일상을 살며 마지막 인사를 준비하신다. 입안 가득 향기 퍼지는 사탕 옥춘당을 좋아하시던 할머니는 할아버지와의 이별 후 말을 잃고 아무 때나 잠에 빠지셨다. 의사가 조용한 치매 환자라 칭한 할머니는 할아버지와의 소중한 기억만 품은 채 현실에는 무관심하셨다. 할머니는 10년 요양원 생활 끝에 220㎜ 실내화만 남기신 채 떠난다. 할아버지가 떠나고 20년 후였다.
저무는 순간도 아름다운 노을 같은 그림책이다. 할아버지 할머니의 고요한 사랑이 저릿한 이야기와 그림 안에 녹아들었다. 고정순 작가는 특별한 품격을 갖는다. 아프고 서늘한 이야기, 사라지는 것들, 소외된 이들의 마음 표현 들을 주로 작품에 담는다. 검은색과 갈색의 부드러운 색연필을 주로 사용한다. 이 책은 본문 용지 질감도 특별히 부드럽다. “슬픈 세상에 사랑만이 유일한 구원”인 작가의 슬프고도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대하며, 참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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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팽이도 달린다
황지영 지음, 최민지 그림 | 사계절| 2023
달팽이같이 느리고 여린 이야기 다섯 편이 담겼다. 천천히 달팽이걸음으로, 삐거덕거리는 걸음으로 우리 주변 눈여겨볼 곳들을 잘 살피라고 이르는 듯하다. 매일 저마다의 방식과 속도로 기죽지 않고 씩씩하게 지내는 어린이들 일상이 생생하다. 달팽이와 복어 같은 작은 생명체들부터 장애, 빈곤, 가정폭력을 겪는 아이들까지, 약한 존재들의 작지만 큰 목소리를 담은 이야기들이다. 작가는 보드랍고 따뜻한 이야기들을 달팽이 등에 태워 세상 밖으로 내보내는 듯하다.
〈달팽이도 달린다〉 편에서는 달팽이를 반려동물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어린이가 사랑스럽다. 그저 느릿느릿 움직이는 듯 보이는 달팽이 몸짓을 “파도가 일렁이듯” 걷는다고 표현하는 관심과 관찰력도 놀랍다. 〈땡땡 님을 초대합니다〉에서는 한 엉뚱한 친구가 유명 작가를 용돈 3만원으로 학교 ‘작가와의 만남’ 시간에 초대한다. 친구의 자존심을 지켜주며 작가에게까지 예의를 차리는 어린이들 모습이 대견하다. 이어지는 〈잠바를 입고〉, 〈복어의 집〉, 〈최고의 좀비〉 편도 살뜰한 이야기들을 자분자분 전한다. 마음을 열고 귀 기울여 살필 만한 여리고 아픈 형편들이 담겼다.
우리 사회 곳곳에는 쉽게 표현하기 어려운 일상을 각자의 속도로 살아내는 이들이 많다. 인간과 동물, 장애인과 비장애인, 어린이와 노인 등 이 세상의 다양한 생명체가 함께 편안히 어울려 살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이를 조용히 묻는 듯한 이야기들이다. 이 책 속 존재들처럼 서로 존중한다면 이 세상은 조금 더 다정한 빛으로 가득하겠지. 우리 눈에 잘 안 보일 뿐 달팽이도 엄연히 달릴 줄 안다. 작가가 권고하는 대로 ‘각자의 방식과 각자의 속도로, 걷고 달리고 구르고 미끄러지면서 더 넓은 세상을 만나’면 참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