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성실한 러너였다. 일과가 마무리되면, 망설임 없이 운동화 끈을 조여 매고 근처 공원으로 달리러 갔다. 온몸을 진득하게 감싸는 땀은 멀리서부터 불어오는 강바람이 식혀주었다. 하도 숨이 가빠 이러다 쓰러지는 거 아닌가 싶을 즈음, 달리기 앱이 알려주었다. ‘목표 거리를 달성했습니다!’
하지만 언제부터였을까. 시간이 날 때마다 방바닥에 누워 있게 된 것은. 뛰는 일은 고사하고 걷는 것도 귀찮아 가까운 거리도 차로 다녔다. 그러다 보니 점점 몸이 무거워지고, 땀 나는 게 싫어지고, 보송한 몸을 유지하기 위해 움직임을 최소한으로 했다.
아마 팬데믹 때부터 생긴 습관인 것 같다. 신체 분비물은 위험한 거라는 인식이 강해졌고, 용기 내 달리러 가도 마스크 때문에 금세 지쳤다. ‘차라리 관두자’ 하며 보낸 세월이 3년. 어느새 ‘엔데믹’이라지만 내 몸은 여전히 팬데믹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바깥 공기가 가을에 가까워지니 조금씩 마음이 들썩였다. 사계절 중 여름을 가장 좋아하는 나는 처서가 되면 기분이 가라앉기 시작하는데, 달리기 좋은 계절이 오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반가웠다. 하지만 이 몸으로 다시 달릴 수 있을까. 만성 허리 통증에다, 장시간 앉아 있으면 퉁퉁 부어 일어날 때마다 괴로운 다리. 자연스레 몸무게도 늘어 운동복이 맞을지조차 알 수 없었다. 달리지 않을 핑계는 얼마든지 만들 수 있었다.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움직일 이유는 사라지는 법. 그래서 하루는 무작정 나가보기로 했다.
오랜만에 꺼낸 운동화는 세월만큼의 먼지를 달고 있었고, 운동복은 맞지 않아 껴입는 사이에 온몸에 땀이 솟구쳤다. 하지만 달리겠다고 마음먹은 것만으로도 얼마나 대단한가! 스스로 응원하는 마음으로 달리기 앱을 켰지만, 잃어버린 아이디와 비번을 찾느라 한참 난리부르스를 춰야 했다. 한참 뒤 작동을 시작한 달리기 앱을 열고, 좋아하는 음악이 흘러나오는 블루투스 이어폰을 귀에 꽂고, 간단히 몸을 푼 다음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달리기를 재개할 때마다 실감하는 게 있다. 비록 나는 달리기를 잊었지만, 몸은 달리는 나를 기억한다. 천근같이 느껴지던 다리는 리듬감을 되찾아가며 나를 앞으로 끌어당긴다. 한참을 뛰니 얼굴은 열감으로 폭발할 것 같고, 심장이 격하게 뛰었다. 더는 참을 수 없어 이제껏 달린 거리를 보니 겨우 1.5㎞. 그냥 집에 갈까.
발길을 돌리려는 찰나, 내 옆으로 다른 러너가 지나갔다. 온몸을 땀으로 휘감은 채 호흡을 가다듬으며 한 발 한 발 내딛고 있었다. 멈춰 선 내 이마 위로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앞선 그는 이 바람에 땀을 식히며 또 한 번 힘을 내겠지. 그런데 나는 이 바람에 모든 걸 포기하고 집에 갈 생각을 하고 있네.
달리기를 포기하고 싶은 순간, 나를 가장 독려하는 것은 선물처럼 불어오는 바람과 힘겹게 뛰고 있는 또 다른 러너다. 그 둘을 한꺼번에 만났으니 다시 뛸 수밖에. 오던 길을 거슬러 달리며 다짐했다. 오늘은 딱 3㎞만 달리자. 거기까지만 해도 성공이야.
이후 수많은 고비가 찾아왔지만 3㎞를 채우는 데 성공했고, 그날 이후 일주일에 세 번씩 달리고 있다. 매번 ‘더는 못 달릴 것 같은데?’ 싶어 거리를 체크하면 2㎞ 남짓. 하지만 이 숫자가 한 달 뒤, 아니 석 달 뒤엔 훌쩍 늘어 있기를 기대한다.
나를 다시 달리게 해준 계절이 반갑다. 9월의 시원한 바람도, 나처럼 다시 달리기로 결심한 러너들에게도 고맙다. 바람의 위로와 러너의 응원으로 오늘도 나는 달린다. |